나에게 2021년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이라 하면 당연코 히어로 인 크라이시스다.

이 책은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은 요소가 있는데, 바로 모든 영웅을 상황에 맞게 상담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시설이다.

보통 치트키로 쓰이는 요소를 시작부터 써먹으니 신선한 방식으로 보였다.

나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하기 전에 치트키를 써보려 한다.

바로 후반부 캐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할거다.

 

 

상실의 순간

 

히어로란완벽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러면 그렇지 못하게 되니까.”

-클락 켄트-

 

단 한순간, 단 한순간이 자신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 영원토록.

그간 어떻게 생각하던, 어떻게 행동했던 그 과정과 결과와 상관없이 말이다.

단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면 반드시 겪는 그런 과정 말이다.

 

히어로 만화에서는 이 순간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이 찰나를 늘려서 영원토록 움직이게 만드는 히어로와 빌런을 만들어낸다.

배트맨은 부모를 잃었고, 렉스루터는 머리카락을 잃었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상실의 순간이 캐릭터를 영원히 움직이게,

또한 변하지 않게 만드는 핵심장치이다.

지치지 않는 히어로들은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히 움직인다.

마치 화살의 패러독스에 갇힌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보는 영웅들과 악당들의 모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다들똑같았어. 다들아팠지.”

-마이클 존 카터-

 

하지만, 이미 너무 망가 질대로 망가져서,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포기하고 싶다면?

히어로 인 크라이시스는 이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 연철공 이야기를 꺼낸다.

연철공이란 쇳물 위의 불순물을 제거해서 철을 강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모든 영웅들은 망가질 수 있으며 불순물을 제거해서 완벽한 존재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그래서 슈퍼맨의 품격과 배트맨의 의지와 원더우먼의 연민을 더한 로봇치료사로 영웅들의 불순물 제거 작업을 돕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웅들은 로봇 앞에서 고백을 한다.

이 고백 과정은 책에서 다양하게 표현이 된다.

 

안녕! 예쁜이! 고해성사는 잘돼 가시고?!”

-할린 프랜시스 퀸젤-

 

강철의 사나이는 아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답을 찾지 못한다.

어둠의 기사는 반복되는 가족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진리의 여신은 고통이 찾아와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는다.

 

기계를 만든 트리니티는 고해성사를 통해 해답을 못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저 자신의 책임감을 다시 한번 느낄 뿐이다.

그들은 고해성사의 목적을 알기 때문이다.

영웅들이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 때 고백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

 

대부분의 작품에서 한 캐릭터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난 과정을 거치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인물들의 고백을 듣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시설을 극 초반부터 등장하게 하였다.

 

…그냥 언제나야.”

-라간-

 

이 과정은 영웅에 맞게 다양히 표현된다.

트라우마 이전에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트라우마의 순간을 반복해서 극복하게도 하고

트라우마를 이후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물들은 이 시설 안에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며

고백을 하고 다시 한번 나아갈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고백만으로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라간-

 

이런 끝판왕 도구에도 끝내 치료되지 않는 세 명의 인물은 바로

할리퀸, 월리, 부스터 골드이다.

"그래. 소녀박쥐"

-할린 프랜시스 퀸젤-

 

먼저 할리퀸,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듯이 가해자에 의해 태어난 또 다른 가해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사건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행동한다.

트라우마는 트라우마고 그 나쁜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로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고

그렇기에 그녀는 트라우마의 존재인 조커를 봐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됐네. &$@@깔 세상. 바뀔 떄도 됐지."

-할린 프랜시스 퀸젤-

 

오히려 나쁜 기억으로 고정되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좋은 기억으로 바뀌려 하자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는 부정적이어야 하는데

이 순간이 좋은 기억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츄어리의 도움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나 미쳤잖아."

-파멜라 릴리안 아이슬리-

 

그런 그녀의 독을 치료해주는 것은 포이즌 아이비다.

도움이 안 된다는 할리의 말을 계속 들어주며, 비꼬는 할리의 말도 들어주며, 정신 이상자라는 말도 들어준다.

아이비는 그렇기에 계속 노력한다고 답하는데 할리는 그렇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왜 도움이 된다고 했을까?

할리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만 힘들 줄 알았지만,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았다는 것,

그 사람도 노력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 것이다.

 

"피가 가렸어."

-마이클 존 카터-

 

다음은 부스터 골드이다.

할리가 타인에 의해 시작된 고통이라면, 골드는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케이스다.

그래서 생츄어리 내에서 다른 이들이 여행을 할 때 그는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혐오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이 상황이 효과가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할리와 마찬가지로 생츄어리에서 치료되지 않은 히어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스터는 이 트라우마를 넘겼을까?

"우리의 불문율."

-테드 코드-

 

골드와 닮았지만 똑같지 않은 블루비틀의 존재 덕분이다.

골드 부스터는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영웅이지만,

블루에게는 항상 서로 곁에 있고 언제든지 받아주는 친구이며,

이로 인해 힘든 일이 있어도 도와주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골드가 영웅들에게 감금되었어도 구출해준다.

골드 또한 같은 생각을 할 것이 당연한데

블루의 히어로 이전에 형제다라는 말에 똑같이 답하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렇게 친구라는 존재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리는 어떨까?

월리는 생츄어리에서 묘사된 모든 치료 방법을 시도했다.

"희망이… 돌아왔단 뜻이야!"

-배리 앨런-

 

트라우마 이전에 행복한 순간도,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생각한 순간도,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후 순간도,

그러나 월리에게는 소용이 없어 보였다.

"나도 사랑한다."

-월리 웨스트-

 

그렇게 치유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놨지만

오히려 그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무너진 꼴이다.

 

"전 거기에 무너졌어요."

-월리 웨스트-

 

월리는 극 초반 생츄어리를 파괴하면서 ‘연철공은 죽었다라고 적었다.

처음 보면 생츄어리가 연철공이고, 히어로는 불순물을 제거하러 들어간 무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연철공이 영웅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영웅스러운 일을 하면 보상이 아닌 불순물이 쌓여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웅적 행위를 희생하는 이타적인 행위라 생각했을 때,

월리는 자신이 사회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 결과에는 보상이 아닌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끝없이 혼자라 느끼고,

이는 나만의 특별한 고통이라는 것이라 느꼈고

이를 증명하려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알아봤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무너졌다.

 

"거참 아름답네."

-할린 프랜시스 퀸젤-

 

그 무너짐의 대가는 참혹했다.

그럼에도 실수한 사람은 기회를 얻었다.

의도치 않은 행위라는 것을 알기에,

실수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이타적인 행위가 그에게 작은 기회를 줬다.

 

그는 용서가 아닌 기회를 얻었고

좋은 사람이기에 기회를 얻었을 때 안도감 대신 죄책감이 들 뿐이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그를 더 뛰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월리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끝없는 죽음 굴레에 갇혀서 영웅으로 희생하려 한다.

"히어로 이전에 형제다."

-월리 웨스트-

 

골드는 그런 월리에게 한마디한다.

"히어로 이전에 형제다."

그렇게 월리는 가족을 얻었고 그는 영원한 굴레에 갇히는 것이 아닌

죄인의 삶을 선택해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여담

1. 이 책을 읽었을 때 든 생각이, 영화 엑스맨 : 다크 피닉스가 나쁜 평가를 받는 거랑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했음

이유는 다크 피닉스도 나름 때깔은 좋게 뽑힌 작품인데

다크 피닉스의 캐릭터를 위해서 찰스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를 캐붕한게 컸기 때문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야기를 위해 월리의 캐릭터성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기에....

(뭐 이건 작가 잘못이 아니라 편집부 잘못이 크다곤 하지만)

 

2.그래도 월리의 의도치 않는 폭주는 이해됨.

다만 그 후에 월리가 5일 동안 잠수 탄 거(사실 뭐 하긴 했는데 그 부분 묘사가 영...)

로이스 레인에게 편지를 보낸 의도가 명확히 와닿지가 않은 점이 너무 크게 단점으로 작용했음

여러모로 후반부 이슈가 너무나 아쉬웠음

여기서 2~4이슈 정도 더 써서 잘 마무리했으면 어떨까 싶긴 한데.. 그래도 그게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들긴 함

뭐 결국 플포랑 애뉴얼에서 마무리했으니 된 건가...

 

3.글 시작 때 작년에 자주 읽었다 했는데 개인적으로 내 상황이 몇 개 맞물려서 꽤 자주 읽긴 했음.

그래서 이 글도 원래 1월에 올리려 했는데 뭔가 좀 그래서 묵혔다가 몇 부분만 수정해서 이제야 올림

(이 삭제한 부분때문에 중간 연결이 어색한 지점이 좀 있네)

 

4.이 책 번역은 진짜 깔끔하게 됐음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 2가지가 있는데

그래. 소녀 박쥐.”

이 부분이랑

존 키츠의 시 번역 부분

시 부분 번역을 더 이야기하자면

영화 패터슨에 나오는 대사인데

번역된 시는 비옷 입고 샤워한 느낌이랄까요.” 라는 대사가 있음

시는 번역이 진짜 어려운 장르인데, 운율을 살리면 뜻이 죽고

뜻을 살리면 운율이 죽기 때문이라 해석했는데

(만약 둘 다 살리면 그 유명한 브이 포 벤데타처럼 초월번역이 되긴 하지만)

운율적인 부분에서는 국내 발간된 시집이 낫지만

의미 전달부분에서는 히인크 번역이 너무 깔끔하게 됐고

그 부분이 취저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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